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루터 (문단 편집) == 비판 == 루터의 업적은 많은 이들이 인정하지만 생전부터 열렬한 지지자들보다 안티들이 훨씬 많기 때문에 행적은 물론 신학적인 면조차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일단 신학적인 면에서는 가톨릭교회와 다른 개신교 교파뿐만 아니라 '''현대의 루터파 신학자들에게 조차도 비판을 받는다.''' * 반유대주의 철두철미한 [[반유대주의]]자이며 [[유대인]]의 [[절멸]]까지도 악질적으로 옹호했다. 루터는 1543년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를 저술 했는데 내용을 보면 첫째 그들의 [[회당]]과 [[학교]]를 불사르고, 둘째 그들의 집을 파괴하고, 셋째 [[탈무드]]를 뺏고, 넷째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고 다섯째 노상에서 유대인의 통행권을 폐지를 권고 했다. 이는 저작자 이름만 가리면 [[20세기]]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을 연상할 만큼 충공깽할 만한 내용이고[* 실제로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라는 비판도 받았다.] [[나치 독일]]도 이런 구절을 정치적으로 적극 이용했다. 거기에 뒤의 내용을 보면 여섯째 유대인의 고리대금업을 금지하고 은금을 뺏어 보관할 것, 일곱째 젊고 튼튼한 유대인 남녀들의 손에 [[도리깨]], [[도끼]], [[괭이]], [[삽]], 실감개 대, 물레가락을 주어 이마의 땀으로 빵을 벌게 할 것을 권고. 앞의 조항들과 연결하여 보면 이것은 유대인에게 그들의 종교를 부정하고, '독일인'보다 열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재산]]마저 강탈하며, 한 곳에 가둬 놓은 채 노예 노동을 시키자는 주장이다. 게다가 이 저서를 발표한 목적은 "이토록 유해한 '''유대인의 활동에 반대하며, 그리스도인에게 유대인을 경계'''할 것을 경고하고자 이 소책자를 썼다"고 대놓고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들을 [[도륙]]한다고 해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등, 미래의 [[홀로코스트]]를 예견한 듯한 발언까지 하였다[* 로드니 스타크, 손현선 번역,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63~64p, 헤르몬, 2018 / 저자 로드니 스타크는 악질 [[반기독교주의]]자나 전투적 [[무신론자]]가 아니라 [[미국]] [[베일러 대학교]]의 [[사회학과]] 교수이자 동 대학 종교사회학 연구소 소장이며,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서도 여럿 저술한 석학이자 개신교인이다.] 루터의 생각으론 유대인들이 옹고집으로 기독교를 거부하고, [[신성모독]] [[무신론]]에 물든 것은 [[고리대금업]]에 손대서 [[타락]]한 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래서 당시 금지했던 유대인의 토지소유와 [[길드]] 가입 허용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유대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유대인 랍비들은 유대인의 계율은 농업과 공업에 종사하는 것을 명하고, 대금업은 부정적이다. 만약 유대인들의 경제활동이 허용된다면 고리대금업을 금하겠다.고 화답했다.[* 이스마 엘보겐, <독일 유대인의 역사>][* [[유대인]]들은 [[동유럽]]에선 현대까지, [[서유럽]]에선 근대 이전 토지소유가 금지되었고, [[기독교]]인이 아니기에 [[공무원]] 임용 길도 사실상 막혔다. 1918년까지 프로이센에서는 유대인의 [[장교]] 임용까지 금지했다. 유대인들에게 허가된 유일한 직업은 폐품 수집이었다. 또한 [[길드]] 가입도 금지되었다. 한편 이 때문에 길드와 무관한 사치품 수공업으로 개척하여 근대 이후 경제가 성장하자 많은 돈을 벌기도 했고, 공직이 허가되지 않았기에 교육받고 성공한 유대인들은 자유직업인 [[의사]]와 [[변호사]] 선택비율이 높았다.] 그리고 루터는 처음에는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관심을 가졌고, 루터가 [[성경]]의 [[정경]] 기준으로 선택한 것도 유대교 회당의 구약성서의 범위에서 선택한 것이었다. 또한 반유대주의가 만연한 [[유럽]]에서 그는 오히려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이며 제자들이니 박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웠고 그에 감격한 [[독일]] 내 유대인들이 당시 종교재판의 광풍으로 개종 아니면 화형 크리로 위협받는 에스파냐의 세파라딤(Sepharadim)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인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라며 희망을 잃지 말자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나름대로 '기독교를 개혁하면 유대인들을 루터파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당시 유대인들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양립할 수 있다'는 주장에 공감하며 종교의 통합의 가능성까지도 열어 두었지만, 그 해결책이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완전히 개종해야 한다'는 의견에까지는 공감하지 못했다. 결국 루터가 유대인들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어마어마하게 과격한 발언들을 쏟아낸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상기 문단을 인용한 진보성향 기독교인인 로드니 스타크 [[미국]] [[베일러 대학교]] 교수이자 세계 종교사회학 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많은 개신교 학자들이 억지로 루터를 옹호하고, 그의 반유대주의를 축소하거나 [[아돌프 히틀러]]와의 연관성을 '단절' 시키려는 시도를 하였으며 '루터의 반유대주의에 침묵'한 것에 경악스러울 지경'이라고 그의 저술에 적고 있다.[* 로드니 스타크, 손현선 번역,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64~65p, 헤르몬, 2018] 스타크 교수의 결론은 '''루터는 반유대주의자가 맞으며, 나치 독일은 루터를 계승한 것이다'''[* 로드니 스타크, 손현선 번역,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65~66p, 헤르몬, 2018]. 그가 개신교인이자 자신의 저술 서문에서 '종교개혁은 결과적으로 기독교 입장에서 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명백한 반유대주의자이자 유대인의 노예화, 학살 옹호자라고 결론지었다. 다만 개신교, 특히 [[루터교]] 신학계에서 루터의 반유대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교회 체제를 거부하고, 오히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했다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순교한 [[디트리히 본회퍼]]도 루터교 목사였다. 현대 루터교회는 대부분 반유대주의를 거부한다. '''루터는 반유대주의가 보편적이었던 근대 이전의 사람이었으므로 크게 놀랄 것도 아니다.''' * 두 정부론(Zwei-Reiche-Lehre) 비판 토마스 뮌처 등의 시민들이 [[교회]]와 [[왕권]]의 수탈과 [[억압]]에 못 이겨 일으킨 '''[[독일]]의 농민 봉기에 대해서 농민들의 편에 서지 않았던''' 탓으로, [[위선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토마스 뮌처는 한때 루터의 지지자였으나 루터와의 신학적 견해가 엇갈리자 루터를 종이 쪼가리에서 하나님을 찾는 멍청이이고 악마라며 비난했고, 루터는 최대의 욕인 로마 추종자라는 욕을 먹고 절연했는데, 사실 여기에 어느 정도 루터의 책임도 있다. 루터가 주장한 만인사제론은 농민들에게는 새로운 구원의 메시지로 여겨졌으나, 루터는 만인사제론을 신앙의 관점으로만 언급한 것이라 하여 농민봉기에 반대했다. 루터는 무식하고 상스러운 무리들이 자신의 두 정부론을 이해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에 속한 영적인 정부 아래에선 만인이 평등하지만, 세속정부에서는 엄연히 질서가 있고 순종해야 된다는 주장이었다. 루터는 처음에 ≪[[슈바벤]] [[농민]]들의 12개조에 답하여≫라는 글로 농민들이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으며 그들의 주장은 매우 타당하다고 평가했다. 다만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며 폭력적 수단은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어떠한 명분이라도 폭력이 동반되면 그들의 명분은 변질되고 폭도로 돌변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데, 영주들이 수탈한 것은 한두 해 일도 아니고 루터가 권고한다고 들어먹을 일도 아니어서, 루터가 할 수 있는 방향은 도덕적 권고에 그칠 뿐이었기 때문에 실효성은 전무했다.[* 현재는 '독일 농민 전쟁'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비판이 있다. [[독일]]에서만 그친 것도 아니고, 농민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광산의 [[광부]] 도시 하층민들의 참여가 더 많았으며, 몰락 기사와 일자리를 잃은 용병들까지 참여했다. 실제 무력충돌이 일어난 것은 후반 3달 정도다. 사실 크고 작은 규모의 농민의 난은 1523~1525년에 처음 일어난 것은 아니다. 14세기부터 다발적으로 전 유럽에서 일어났으나 종교개혁시 중남부 독일 지역 뮌처가 이끈 사건이 제일 알려져 있다.] 물론 토마스 뮌처는 다른 선동자와 급이 달랐다. 뮌처는 훗날 다른 사이비들이 자신들이 [[성령]]을 직통으로 받았다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보다 우위에 있다하여 예언드립치며 계시를 무기삼아 사람위에 군림하고, 농민들의 무지함을 이용하여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워 신정국가를 만들고 자신들은 하늘의 계시에 따라(?) 6처, 9처, 15처씩 아내를 두고 금방 특권층이 되어 영주행세를 하다 진압된 데 비해, 뮌처는 단순 농민반란이 아니라 진정한 사회개혁을 구상하고 추진했다. 초기의 [[사유재산]] 폐지와 [[농노제]] 폐지 공동생활들을 주장한 것을 실제로 이행했다. 뮌처는 탁월한 설교가이기도 하여 예수의 산상수훈을 바탕으로 '고난 받는 자가 선택된 백성'이라는 가르침은 농민들에게 깊이 파고들었다. 루터는 뮌처의 급진적인 가르침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받는다, 그러나 고난 받는 이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며,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는 하나님만 아신다.'''라며 신비주의적 예언과 선택받은 백성과 받지 못한 백성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구분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뮌처는 지주와 지배계급을 구약시대 가나안 주민으로 농민들을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비유했고 자신을 기드온의 검이라며 무력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배계급을 처단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했고, 이 파급력은 결국 농민들의 불만에 불을 붙였고 활활 타오르게 된다. 각지에서 뮌처에 호응하는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다 루터가 작센 지방에서 설교 중에 야유를 받으며 설교단에서 끌어내려지고, 비텐베르크 주변에서 농민들이 아이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의 가슴을 도려내고 항복한 지주 15명을 벌거벗겨 고문하고 죽인 사건이 소문이 퍼지자 루터는 농민들을 맹비난한다. 루터는 ≪살인과 강도를 일삼는 농민들에 반대하여≫라는 글을 써서 그동안의 관용을 버리고 이들이 봉건질서를 무시한 반역자들이며 죽어야 하는 이유가 이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단이며 '''반란자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 선언했다. 그리고 광신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의 무리가 살인 약탈을 일삼으며 기존 지주뿐만 아니라 루터파와 가톨릭 신자까지 무신론자라며 척살하고 자신들이 폭력행위가 [[기드온]]의 칼로 [[가나안]] 주민들을 학살하는 것이며 지상에 새로운 시온왕국과 새 예루살렘, [[천년왕국]] 타령을 하는 것을 비난했고 전쟁질, 폭동질을 하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떼라'''고 일갈했다. 결국 토마스 뮌처는 5천의 농민들을 이끌고 2만의 병력의 진압군과 전투 끝에 잡혀 처형당하고, 이번엔 영주와 지주들의 피의 보복이 이어졌다. 반란농민 뿐만 아니라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농민과 노약자들까지 무참히 죽었다. 농민 전쟁이 일어난 지역은 초토화되었고, 봉건적인 구속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농민들은 자신들을 배신한 루터에게 '비텐베르크의 교황'[* 루터가 교황권을 공격한 이상으로 교황에 적대적이라, 뮌처는 초기에 독일 제후들에게 자신에게 병력을 지원해서 로마를 공격하고 교황을 없애자고 제의했다. 당연히 제후들은 무시했고, 미친놈 취급했다. 그 후 제후와 지배계급을 로마추종자들로 몰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이라며 저주했다. 루터는 나중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영주들이 농민에게 관대하게 대할 것을 촉구했지만 이미 토마스 뮌처가 패망하며 5천여명의 농민들이 2만여명의 진압병력에 토벌 당하고 뮌처는 추종자 53명과 나란히 처형당한 후였다.[* 모든 독일 농민전쟁과 토벌이 토머스 뮌처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살인과 강도질을 일삼는 농민무리에 반대하여'라는 제목의 짧은 글은 원래 루터가 평화에 대한 권면이라는 책에 일부에 쓰인 글이었는데, 출판업자가 이것만 먼저 출판한 탓도 있다. 평화에 대한 권면 내용은 영주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더 많았다. 영주들에게 당신들을 반대하는 것은 농민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악명 높은 동물의 십일조와 농노들에게 [[상속세]], 사망세, 수렵이나 고기잡이 같은 데서 세금을 걷는 것은 폐지하라.고 주장했다.] 이후 쏟아지는 비난에 "제가 농부들을 다 때려죽였습니다. 농민들이 흘린 피는 내 책임입니다."라고 책임을 인정했지만 자신의 신학적 주장의 당위성은 굽히지 않았다. 농민들은 루터에 대한 지지를 완전히 거두었으며 정치적으로 루터의 영향력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루터는 [[성경]]대로 행하기 위해서 바울과 베드로의 서신인 [[로마서]]과 [[베드로전서]]에 나온 '권력에 복종하라'는 말씀에 충실했다는데, 토마스 뮌처를 비롯한 비판자들은 루터가 제후들의 보호를 받아 [[종교개혁]]을 성사시키고 있던 루터가 농민들의 편에 서게 되면 결국 영주들이 루터를 버리게 될 것이고 종교개혁이 실패할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하에서 움직였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리하여 당시 급진 혁명론자들과 토마스 뮌처를 높이 평가하는 사회주의계열의 영향으로 "루터가 사실 정치적으로는 비열한 [[위선자]]!!"라고 비난한 이들도 있다. 그리고 루터는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성경 문구대로 세속권력에 저항하지 말라고 주장했는데 이 두 사도의 서신은 로마시대 기독교인들이 세속권력에 반대하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되기 때문에 말린 것이고 1500년 후의 유럽은 기독교 문명 사회였기 때문에 루터의 세속권력 복종 타령은 성경의 의도를 오히려 반대로 해석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두 정부론 자체가 가톨릭교회의 세속 간섭과 그로 인한 병폐를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 태어났기 때문에 반대로 종교가 세속과 분리될 경우의 문제점이 발생할 가능성은 간과했다. 그러니 태생적으로 루터가 예상치 못한 사회변혁에 대안이 되기 어려웠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루터가 농민들을 저버렸다는 비판은 무리가 따르는 게, 작센 선제후에 납치되어 1521년 바르트부르크 성에 있을 때도 선제후에게 청원하여 선제후가 황제에게 거역하지 말고 자신을 [[석방]]하여 [[명령]]을 따르라고 권유했다. 제국 추방령이 떨어진 상태에서 법의 보호도 못 받고 루터의 추종자들이 가톨릭 우세 지역에서 고문 살해당하는 형편이었고, 본인조차도 살해 협박에 시달렸는데, 신교도 선제후를 보고 가톨릭의 수호자인 황제에게 세속적으로 거역하지 말 것을 주장한 것과 1522년 기사들의 난 때에도 지지하지 않은 것을 보면 최소한 일관성은 있었다. 루터가 세속적인 혹은 영적인 지도자 지위를 원했다면 루터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한 츠빙글리와의 교리논쟁을 비타협적으로 매몰차게 거절할리가 없지 않은가.[* 15개 교리 항목 중에 14개가 일치하였고, 나머지 15번 항목에서도 6개중에 5개가 일치하였는데, 죽어라고 타협을 거절한 것은 성찬 예식 하나였다.]루터는 다른 문제는 몰라도 신학과 교리에선 꽉 막힐 정도로 고집불통이라 지지자들이 갑갑해 할 정도였다. 제자이자 가까운 지지자이며 동료 교수인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은 루터에 대한 존경심은 잃지 않아도 꽉 막히고 비타협적인 루터 대신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루터의 허락 없이 멋대로 타협했고, 선제후조차 루터보단 유연한 멜랑히톤을 선호할 지경 이었다. 2차 대전이후 루터의 두 정부론이 독일 개신교회에 영향을 미쳐 국가의 세속권력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논리가 되었고,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과 [[나치 독일]]에 순종한 루터파 교회의 무기력함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른 게, 가톨릭교회에서도 1933년 나치와 맺은 정교 협약을 준수해서 나치에 대한 비판을 자제했고, 13,000명의 개신교 목사 중 대부분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고 나치에 호의적인 성향의 <독일인의 교회> 가입한건 3천여명이고 그나마 그 조직도 금방 와해되었다.[* 나치들이 침투해서 고위직을 차지하니 초기 반공 성향으로 나치에 호의적이었던 목사들도 정치질에 질려서 때려치고 나온다.] 반나치 성향의 <고백교회> 소속 목사는 2,000명이었는데 이들은 700명이 수용소로 끌려갔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대부분의 목사들도 루터파의 신학인 세속 정부엔 복종하되 교회를 정치에 이용하는 것은 배격하는 루터의 입장에 충실해서 방관적이었다. 20세기 중반에 들어 마르틴 루터가 독일 농민전쟁에 지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이 쏟아져 내린 것은 어느 정도 동독시절 토마스 뮌처를 띄워주려는 의도도 작용했다. 토머스 뮌처는 구 동독의 5마르크 지폐의 주인공이고 마르크스-레닌처럼 동독 공산당에서 혁명가로 숭상 받았는데, 루터의 보수성과 대비되는 혁명가로 토마스 뮌처를 필요 이상 띄워주려니 상대적으로 혁명의 동기를 제공한 루터를 깎아 내릴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뮌처의 혁명성도 지금 기준에서 보면 상당히 반봉건적인 여부를 떠나서 종교적 선동 요소가 다분했고[* 대표적으로 라며 성령을 직통으로 받았다는 주장과, 무신론자를 척살하며 교황청을 토벌한다는 구호.] 루터 또한 전후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동독 공산당과 사회주의 학자들에게 비난만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루터는 상대적으로 구체제와 기독교인 인물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동독에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었기에. 루터의 두 정부론은 세속군주에 세속적인 명을 복종하라는 것이지 영적인 면에서 침해를 당하면 저항권을 인정했다. 1523년 저서 <<교회에 대하여>>를 통해서 그리고 세속군주는 자신의 영토 내 교회를 보호해야 할 의무는 있지만 영적인 면에서 교육하거나 간섭할 의무는 없다며 선을 그었고, 비슷한 시도에 대해서는 반대를 분명히 했다. 세속적으로도 1528년까지는 작센 선제후에게 까지 황제에게 거역하지 말 것을 당부했지만 1529년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카를 5세]]가 다시 루터파를 이단척결 명목으로 제국 추방령을 재확인하자 1531년 생각을 바꿔서 세속적 정부보다 하나님의 영적인 정부가 우위에 있으므로 신교도 제후들에게 행동으로 나설 것을 승인했다. 결론적으로, 루터의 두 정부론이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저해하고 위정자들에게 방어논리를 주었다는 비판은 가능하다 이것은 [[2차대전]] 이후 루터파 고백교회에서도 나왔다. 루터파에서는 고백교회의 [[디트리히 본회퍼]], 다른 개신교 신학자로는 스위스의 [[칼 바르트]]가 루터를 매우 비판했다. 그러나 세속 권력에 무조건 복종하라 했다는 주장은 그 당시 시대와 루터의 주장을 잘 이해하지 못한 반응이다.[* Steve Ozment(스티브 오즈멩), 'Protestants: The Birth Of a Revolution' ,NY: Doubleday, 1993. 국내명 '프로테스탄티즘 혁명의 태동'] 한편으로 루터는 농민전쟁 뿐만 아니라 그 후 보여준 보수성 때문에 루터파의 사회적 입장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이전까지 가톨릭교회에서 맡았던 가족과 사회질서를 종교개혁 이후 가부장에게 위임하여 북독일 루터파 개신교 지역은 가부장제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당연히 이런 입장은 가부장뿐만 아니라 사회안정을 원하는 지배계층과 국가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 반이성주의와 노예의지론 비판 한편 [[반기독교]] 계열에서는 루터를 '''[[반지성주의]]'''자의 표본이라고 생각하고 규탄하고 있다. [[개신교]] 내에서도 [[감리교]]를 세운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의 [[존 웨슬리]] 또한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의를 보고 루터의 이성드립을 비판했는데, 올바른 이성이든 그릇된 이성이든 싸잡아 다 비난했다고 비판했다.[* [[성공회]]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중시하는 신학관을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신앙을 위해서는 [[이성(철학)|이성]]의 눈을 뽑아 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와 꽤 비슷한 주장을 여러 차례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예를 들어 1546년 1월의 비텐베르크 설교 중에는 "이성은 악마가 가진 최대의 [[창녀]]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고, 《탁상담화》에서는 "이성은 신앙의 최대의 적이다, 그것은 영적인 것을 돕기 위해 오는 일은 절대로 없고, 오히려 신성에 맞서 싸우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경멸한다"[* 《탁상담화》, p.353] 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인간이 계몽되었을 때, 이성은 신앙에 적대하지 않으며, 도리어 더 발전시키고 진보시킨다"[* 《탁상담화》, 〈On Justification〉, 원문은 "so it is with human reason, which strives not against faith, when enlightened, but rather furthers and advances it." 이상 모두 wikiquote 참조하여 작성함.] 고 정반대로 말하기도 했다. 이상 루터의 상반된 이성에 대한 입장은 이처럼 루터의 이성과 신앙의 관계는 상당히 모순적이어서 루터를 처음 배우는 신학생들조차 매우 혼란스러워 한다. 이는 루터, 그리고 기독교, 또는 개신교를 반지성주의로 몰아가는 측에서 상당히 왜곡하여 악용된 측면이 있는데[* 또 하나로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불합리하기에 나는 믿는다"] 이를 인용한 사람들이 중세 철학 논제나 역사 신학 철학에 대해서 상당히 무지했기에 의도를 거꾸로 인용한 참사이다.[* 도킨스를 비롯한 신무신론자들이 애용(?)하나 정작 중세신학과 철학사에 대한 대가들에 대한 인용은 없고 대부분 18~19세기 찌라시 수준의 출처의 재인용이다.] 일찍이 루터가 자신의 학맥으로 인정한 [[오컴의 윌리엄]]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보편주의에 반기를 들어 새로운 길(via moderna) 노선을 주장하며 '''이성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의 분리'''를 주장했고 이는 중세시대 철학이 신학의 '''시녀의 위치'''에서 탈피하여 독립적 연구를 시도한바 오컴을 '''근대 철학의 선구자급'''으로 인정하는 견해도 있을 정도다. 따라서 오컴의 학맥을 계승한 루터는 한때 오컴의 열렬한 추종자로 새로운 길 노선의 철학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고[* 신학 부분에선 오컴을 비판하며 아우구스티누스 주의로 돌아갔기 때문에 신학 면에서는 많은 차이가 난다.] 고대 그리스 철학 이론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는 루터와 반기독교 주의자들의 비판과는 달리 이성과 신앙의 영역의 분리를 주장하는 오히려 지성주의적 주장이다. 한때 중세 스콜라 신학은 보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신을 알려는 노력을 하면 신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 또는 "그분께서 보상을 베푼다"는 견해가 통설이었다. 이는 열심히 공부하면 신앙에 도움이 된다, 또는 열심히 연구하거나 행하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과 가까웠다. 그러나 이는 앞서 면죄부와 관련된 중세 교회의 타락에 영향을 준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교회에서 인정한 선행을 하면 보속 없이 천국 직행이라는 주장으로 면죄부 팔이에 이론적 기반이 됨.] 이에 대해서 루터가 열렬하게 비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루터는 열심히 공부한다고 노력에 비례하여 은혜를 받지 못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포도원 일꾼의 비유이다. 새벽부터 일한 일꾼이 있었으나 일자리를 찾지 못한 일꾼들을 위해 해질녘에 새로이 참가하지 못한 인부들을 고용했고 일찍 참가한 일꾼이나 동일한 삯을 받는다. 이에 열심히 일한 일꾼들이 불평한다.] [[이신칭의|열심히 선행을 하는 것은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 한다]]는 신학이론으로 맞섰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성이라는 수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다가가야 하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성이 믿음의 영역을 넘어서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를 모두 이해하려는 것은 멍청이가 자꾸 태양을 관찰한다며 쳐다보면 장님이 된다며 비유한 것이다. 전술한대로 루터는 거의 최초로 '''남녀 모두에게''' 공교육과 무상교육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는 어디까지나 세상은 법과 검으로 통치해야 한다며 교회의 영역을 상당히 좁게 해석한 신학자 였다. 이는 모든걸 모르는게 없으며 검열하고 판단해주는 교황청 비판에서 나온 논지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다른 논제일 것 같은 [[자유의지]]론 논쟁도 이 연장선에 있다. 루터는 에라스뮈스와 편지로 논쟁을 한 것도 알려졌다. 그러나 루터와 에라스뮈스는 그 시대 이전과 그 이후의 기독교계의 만년떡밥인 단독설과 신인협력설의 주장을 각자의 논리로 첨예하게 반박했고 이는 현대 신학자들까지 주목하는 업적이다. 두 대가의 논쟁은 종교개혁 이후 여러 사정으로 벌어지자 둘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오갔고, 공식적으로 에라스뮈스가 루터와 절연한 것은 1525년 루터가 결혼하고 나서지만 에라스뮈스의 자유의지론에 반대하여 루터는 노예의지론을 발표하여 논박한 것이 시초다. 사실 루터의 '노예의지론'은 1520년 저작 '기독교인의 자유'와 이어지는 내용으로 얼핏 보기엔 상당히 모순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루터 사상의 정수로 꼽히면서 한편으로는 [[에라스뮈스]]뿐만 아니라 가톨릭, 다른 개신교, 루터파 신학자까지도 반박할 정도의 폭탄급 파급력을 지닌 저작이다. 이 자유의지 떡밥은 현재도 전체 기독교의 단골논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